KNSF NOBEL COL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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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과학 연구는 시장 실패의 영역이다

윤성식 한국노벨과학포럼 명예회장 ·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2025. 11. 19
윤성식
윤성식한국노벨과학포럼 명예회장 ·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물리학, 생물학, 화학과 같은 자연과학 연구에는 오래된 통념이 있다. 노력하고 실력을 갖추면 성과로 이어진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연구의 결실은 운과 환경에 크게 좌우된다. 물론 운도 준비된 사람에게 온다는 말은 옳다. 능력과 노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기회가 와도 잡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전제를 갖춘 뒤에도 운이 작용하는 몫은 여전히 크다. 세계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과학자들 가운데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고백하는 이가 적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극소수를 제외한 많은 인재가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채 연구 인생을 마감한다. 자연과학 연구는 성과의 편차가 대단히 큰 영역이다. 어떤 연구자는 크게 꽃을 피우지만, 같은 능력을 지닌 다른 연구자는 평범한 이력으로 끝난다. 의사의 길은 이와 대조적이다. 웬만하면 상위 수준의 소득이 보장되고, 운에 좌우되는 정도가 훨씬 덜하다. 정년의 구애를 받지 않으니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할 수 있다. 아흔을 넘겨 파트타임으로 진료를 이어가는 의사도 있다.

한국에서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학자의 소득은 의사에 미치지 못한다. 결국 두 길의 차이는 분명하다. 자연과학자의 길은 위험 부담이 큰 길이고, 의사의 길은 위험 부담이 작은 길이다. 이 차이는 우리 사회의 일상적인 정서에도 그대로 배어 있다. 딸이 자연과학자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부모는 걱정한다. 의사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걱정하지 않는다. 개인의 선택을 탓할 일이 아니다.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위험이 작고 보상이 확실한 쪽을 택한다.

자연과학 연구는 시장 실패의 대표적 사례이다. 기초연구의 성과는 사회 전체가 나누어 갖지만, 그 위험은 연구자 개인이 홀로 감당한다. 편익은 공유되고 비용은 사유화되는 구조에서는 시장이 적정한 양을 공급하지 못한다. 정부가 나서서 이를 교정하지 않으면 과소 공급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자연과학자의 수가 넘친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머릿수가 아니라 질이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은 우수한 인재의 과소 공급이다. 최상위 인재가 거의 예외 없이 의대로 향하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것은 시장 실패를 교정해야 할 정부마저 실패하는 경우다. 불과 몇 해 전 정부는 ‘카르텔’을 거론하며 국가 R&D 예산을 대폭 삭감했고, 과학계는 큰 혼란을 겪었다. 온 세계가 인공지능에 자원을 쏟아붓던 시기에, 카이스트의 인공지능 연구실조차 예산 삭감의 타격을 받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시장이 실패해 정부가 개입하는데, 그 정부마저 실패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결국 남는 것은 국민의 몫이 된다. 다시 말하면 결국 국민이 교정하는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문제를 하나하나 파헤쳐 들어가다 보면 놀랍게도 '정치가 문제'라는 결론에 이른다. 과학정책도 예외가 아니다. 연구비의 규모와 배분, 인재가 어디로 향할지를 결정하는 유인 구조는 모두 정치의 산물이다. 과학강국을 위해서도 정치를 바로 세워야 한다. 구체적인 방법은 정치인을 비난하고 탓하는 데 있지 않다. 상식을 갖춘 유권자가 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결국 과학 강국의 조건은 실험실 안에만 있지 않다. 그 조건의 상당 부분은 투표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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